영풍군 (왕족)
영풍군 이전(永豊君 李瑔, 1434년 9월 28일 (음력 8월 17일[1]) ~ 1456년 7월 31일(음력 6월 20일))은 조선의 왕족으로 세종의 16남이자 서8남이며 어머니는 혜빈 양씨이다.
영풍군
永豊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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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의 왕자 | |
이름 | |
휘 | 이전 혹은 이천(李瑔) |
신상정보 | |
출생일 | 1434년 9월 28일 (양력) |
사망일 | 1456년 7월 31일 (양력) (향년 22세) |
사망지 | 조선 충청도 청풍군 |
부친 | 세종 |
모친 | 혜빈 양씨 |
배우자 | 군부인 순천 박씨 |
자녀 | 이갓박(딸), 취성군 이빈(양자) |
생애
편집처 군부인 박씨는 본관은 순천으로 박팽년의 딸이었다. 1441년(세종 23) 1월 11일 영풍군(永豊君)에 봉해졌다[2]. 세종 사후 어머니 혜빈 양씨는 세종의 명으로 현덕왕후를 여읜 어린 단종의 유모가 되어 그를 길렀고, 형 한남군은 수양대군의 정변에 반대하였으며 사육신 박팽년은 그의 장인이었다. 1456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자리를 찬탈하자 영풍군은 어머니 혜빈 양씨, 형 한남군, 이복형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에 가담하여 수양대군과 대립하였다. 사육신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455년(세조 1) 윤6월 11일 혜빈 양씨는 청풍(淸風)으로, [3] 영풍군은 예안(禮安)으로 유배 된 후[3] 6월 27일에는 임실(任實)로 이배 되었다가[4] 청풍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을 가시 등으로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통제하던 형벌) 되었다. 청풍에서의 방금(防禁)조건이 실록에 전해지고 있다.[5]
금방 조건(禁防條件)
1. 난장(欄墻) 밖에 녹각성(鹿角城)을 설치하소서.
1. 외문(外門)은 항상 자물쇠로 잠그고 조석거리는 10일에 한 차례씩 주며,
또 담안에 우물을 파서 자급(自給)하게 하고 외인(外人)으로 하여금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소서.
1. 외인이 왕래하여 교통(交通)하거나 혹 물품을 주는 자가 있으면, 불충(不忠)한 자에 견주어 논단하게 하소서.
1. 수령(守令)이 불시에 점검하고, 문을 지키는 자가 혹 비위(非違) 사실이 있으면 율문(律文)에 의하여 죄를 과단(科斷)하게 하소서.
그 뒤 세조는 1456년(세조 2) 6월 3일에는 청풍 목사(牧使)에게 치서(馳書)하기를, “건장하고 부지런하며 조심성 있는 사람을 골라서 이전(李瑔)의 배소(配所) 네 모퉁이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당자와 잡인(雜人)의 출입을 엄하게 금방(禁防)하되, 힘써 안정(安靜)을 기하여 놀라지 말게 하라."는 유시를 하기도 하였고,[6] 1457년(세조 3) 6월 28일에는 청풍 부사(府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도내 임실(任實)에 안치(安置)된 이전(李瑔) 금방(禁防)을 허술하게 하면 수령(守令)은 진실로 죄를 받을 것이고, 감사(監司)도 또한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다시 금방을 엄하게 더하라.”[7] 하였다.
사망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양녕대군은 세조에게 끊임없이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을 처형할 것을 청하는데, 세조는 금성대군은 사사하였지만 한남군과 영풍군은 위리안치 하였다. 한남군은 1459년 병사하였지만, 영풍군의 사망 기록은 없다. 다만 1458년 영풍군의 아내의 가족을 내보내고 노비를 몰관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사후
편집1712년(숙종 38) 4월 28일 관작(官爵)과 봉호(封號)를 회복하여 신원(伸冤) 되었다.[8] 군부인 박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고 아들이 없었던 영풍군은 1872년(고종 9) 12월 4일 고종대에 이르러 종친들의 건의로 양녕대군의 손자 취성군(鷲城君) 이빈(李頻)이 양자가 되어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9]. 육종영의 한 사람이다.
가족 관계
편집관련 작품
편집드라마
편집출처
편집- ↑ 세종 65권, 16년(1434 갑인 / 명 선덕(宣德) 9년) 8월 17일(신유) 4번째기사 "왕자가 탄생하니 영풍군 이천이다"
- ↑ 세종 92권, 23년(1441 신유 / 명 정통(正統) 6년) 1월 11일(기유) 4번째기사 "왕자 이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 가 나 세조 1권,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윤6월 11일(을묘) 1번째기사 "혜빈 양씨·상궁 박씨 등을 귀양보내다. 노산군이 세조에게 선위하다".
- ↑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6월 27일(을축) 3번째기사 "의금부에서 금성대군 등을 분산 안치하고 지키게 할 것을 청하니 따르다"
- ↑ 세조 10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11월 18일(무인) 2번째기사 "의금부에서 건의한 화의군 이영 등에 대한 금방 조건(禁防條件)"
- ↑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6월 3일(신축) 3번째기사 "금성 대군등의의 배소를 지켜 당자와 잡인의 출입을 금하게 하다"
- ↑ 세조 8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6월 28일(경신) 3번째기사 "경상·전라 관찰사에게 도내에 안치된 종친의 금방을 엄하게 할 것을 명하다"
- ↑ 숙종 51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4월 28일(경진) 1번째기사 "혜빈 양씨 및 그 아들 영풍군 이전의 관작과 봉호를 회복시킬 것을 명하다"
- ↑ 한국고전종합DB 승정원일기 참조 Archived 2014년 7월 14일 - 웨이백 머신 "영풍군 천의 양자 등은 양녕대군 제의 손자인 취성군 빈 등으로 대를 잇게 하여 들인다는 종친부의 계"
- ↑ "만가보(萬家譜) 중에서, 이름 부분에 정(正)은 오탈자이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사후 양자로 입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