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皇帝)는 진나라부터 중화제국 시기까지 사용된 중국의 최고 군주 칭호이다. 중국의 전통 정치 이론에서 황제는 천자(天子)이자 천하 만물의 소유자로 여겨졌다.

황제
皇帝
Imperial
호칭폐하
초대진 시황제
마지막청 선통제
설립기원전 221년
폐지1912년

본래 공자는 대동을 말해서 사유재산이 없는, 너와 나의 것이 없는 유토피아를 말했지만, 현실은, 대동보단 한 단계 낮은, 즉, 소강(小康)이라는, 천하가 한 가문의 것이 되고 소유가 있는, 소강사회에서 지난 2000년간 중화제국은 이루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한나라 이후 동중서의 노력에 의해 유교법가를 대체하는 공식 정치 이론으로 자리잡음으로서 장자 계승을 따라 황제의 계승자인 황태자가 왕조를 구성하는 법칙이 확립되었다.

황제의 절대적 권위에는 다양한 통치 의무와 도덕적 의무가 수반되었다. 이를 지키지 못하면 왕조의 천위(天使)를 제거하고 전복하는 것이 정당화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실제로, 황제는 때때로 엄격한 계승 규칙을 피했고 왕조의 표면적인 "실패"는 성공적인 교체에 의해 작성된 역대 24정사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학자 관료와 환관으로 구성된 제국 관료에 의해 황제의 권력이 제한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명나라 황제처럼 조상의 정책과 왕조 전통에 대한 효도의 의무로 인해 제약을 받는 경우도 존재하였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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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황제는 진 시황제에게서 시작되었다. 기존 중국에서 군주의 호칭은 이었다. 주나라천자만이 왕의 직위를 가졌고, 주변 제후들은 오등작에 따라 차등되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주나라 천자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고 점차 왕을 칭하는 나라가 늘어나 모든 국가들이 왕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중국을 통일의 시황제는 왕과 차별화되는 칭호를 원했고, 삼황오제에서 각기 황과 제를 따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었다.[1] 황제의 아들은 왕이나 친왕으로 봉해졌다. 제(帝)는 본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던 상나라에서 조상신을 일컫는 호칭이었으나[2] 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든 이후 황제의 약어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221년에 진 시황제가 황제의 칭호와 각종 용어를 정립한 이래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자국의 군주를 황제라 칭하였다. 이는 한족이 건국한 왕조들뿐만 아니라 몽골만주에서 생활하던 여러 유목민족이 세운 요나라·금나라·원나라·청나라 등의 유목민 왕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기존에 등의 고유한 칭호를 사용하였지만, 중국을 넘볼 정도로 강력해지면 여지없이 칭제건원하여 중국식 황제의 칭호를 채용하였다. 그러다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폐지되었다. 1934년 만주국에서 허수아비지만 잠시 부활하기도 하였으나 1945년 만주국도 멸망하면서 완전히 없어졌다.

이와는 별도로 당나라고종은 황제 칭호 대신에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3]

중국의 황제는, 본질적으로 하늘의 아들, 즉 천자라 여겨졌으며, 유럽이 종교적 지배자인 교황과 세속적 지배자인 군주들, 귀족들로 나뉘어있었던 것과 달리, 제정일치의 천자였다. 즉, 유럽의 군주들의 정통성은 교황의 승인과 가톨릭이라는 권위를 필요로 했다. 이는 나폴레옹이 황제 대관식 때 교황을 노트르담 성당으로 초청한 것이나, 헨리 8세가 이혼을 하려는데 교황청에서 반대하여 무산될 뻔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황제는 -그것이 맞는 것인지 아닌지는 둘째치고라도- 제정일치 사회였고 그에 따라 천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권한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사에 교황과 같은 속세와 구별되는 또다른 세계의 지배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속세와 구별되는 또다른 진리의 세계는, 불교의 승단과 사찰을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았고, 황제는 광대한 중국영토와 그 생산품들을 소유한 무소불위의, 정말로 반신(半神)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에 따라 황제는 사직단에서 토지신과 곡식신에 제사를 지냈고, 북경의 천단 같은 곳에서는 동양의 절대자요, 만물의 규범이자 법칙인 천(天)에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유교는 이 관념을 확대, 하늘은 어진 이에게는 천하를 주지만, 패악한 이에게는 도로 거두어 가버린다고 주장하여 역성혁명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황제가 정치를 어질게 잘하면 자연재해나 흉란이 안 일어나지만, 정치를 잘못하고 타락하면 하늘이 벌을 주어 가뭄, 홍수, 전란, 전염병 같은 것을 준다고 하는천인상관설까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규범은 중국의 황제의 절대권력을 제어하는데 효과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중국황제의 권한은 조선국왕의 그것보다 훨씬 강력했고 전제적이었는데, 이는 조선은 건국될 때부터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이념에 따라 설립되어, 임금이 신하들의 의견을 안 들을 수가 없는 구조였지만, 명나라나 청나라 같은 경우에는 황제와 신하의 권력의 비율이 황제 7, 신하 3정도로, 그 권력은 매우 집중되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능지처참 같은 형벌도 조선에서는 잔인하다 하여 금지되었지만, 중국에서는 20세기 초까지 버젓이 시행되었는데, 이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천자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목적 또한 분명 존재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명나라, 청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처럼 신하들에 불과한 노론이 득세한다거나 세도가가 임금을 좌지우지하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중국의 황제와 역대 왕조들은 겉으로는 유가를 표명했어도, 그 속은 법가적인 요소가 다분했으며, 이는 조선중기 이후의 (이상주의자들에 가까운) 사림파들과는 분명 구분되는 것이었다.

중국의 황제들이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를 성조(聖朝)그러니까 공자나 요순 같은 성인이 다스리는 왕조라 칭했을지언정, 현실은 끝내 이상을 닮지 못하여, 그들이 소유한 권력은 인간 상호간의 우애, 평등과 같은 본성에 어긋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고, 절대적이었으며, 권위적인 것이요, 신성한 것이었던 것이다.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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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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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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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기》6권 진시황본기 시황 26년
  2. 貝塚茂樹·伊藤道治, 《中国の歴史》1권 〈原始から春秋戦国〉. 講談社, 1974
  3. 上元元年 ~(중략)~ 八月壬辰,皇帝稱天皇,皇后稱天后。(상원 원년 팔월 임진일(역주:율리우스력 674년 9월 20일), 황제가 천황이라 칭하고 황후를 천후라 칭했다.) 《신당서》(新唐書) 〈본기 제3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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