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공방전

그리스 공방전(영어: Battle of Greece), 그리스에서 독일의 그리스 침공(그리스어: Γερμανική εισβολή στην Ελλάδα), 독일 측 작전명 마리타 작전(독일어: Unternehmen Marita[1])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나치 독일이탈리아그리스 왕국을 침공한 전투이다. 1940년 10월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하여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했으며, 1941년 4월에는 독일도 그리스를 침공했다. 연합국이 그리스 본토에서 패배한 이후 1941년 5월 독일군이 크레타섬을 침공했다. 이 전투는 추축국발칸 전역의 하위 작전이다.

그리스 전투
지중해 전역의 일부

독일군의 그리스 점령도
날짜1941년 4월 6일 ~ 4월 30일
장소
그리스
결과 나치 독일의 승리. 크레타 전투 발발
교전국

나치 독일의 기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의 기 이탈리아 왕국

불가리아 불가리아 왕국
그리스 왕국의 기 그리스 왕국
영국의 기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의 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기 뉴질랜드
지휘관
나치 독일 빌헬름 리스트
나치 독일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
이탈리아 왕국 에밀리오 징니올리
그리스 왕국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영국 허니 메틸랜드 윌슨
뉴질랜드 버나드 프레디버그
오스트레일리아 토마스 블레미
병력
독일 ― 군 680,000명, 탱크 1,200대, 항공기 700대
이탈리아 ― 군 565,000명, 탱크 163대, 항공기 463대
그리스 왕국 ― 군 430,000명
영연방군 ― 군 62,612명, 탱크 100대, 항공기 200여대
피해 규모
독일 ― 1,099명 사망, 3,752명 부상, 385명 실종
이탈리아 ― 13,755명 사망, 63,142명 부상, 25,067명 실종
그리스 왕국 ― 13,325명 사망, 62,663명 부상, 1,290명 실종
영· 엔잭 연합군 ― 903명 사망, 1,250명 부상, 13,958명 사상

1940년 10월 28일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하자 그리스는 영국의 공군과 물자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의 1차 공격을 격퇴하고 1941년 3월에는 반격에 나섰다. 4월 6일 마리타 작전으로 알려진 독일의 그리스 침공 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그리스 육군의 대부분은 당시 이탈리아의 종속국이자 이탈리아의 주 공격선이었던 알바니아 보호령 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불가리아에서 침공해 와 제2전선을 형성했다. 그리스는 독일군의 공격에 대비해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군으로부터 소규모 증원군을 지원받았다. 그리스군은 이탈리아와 독일군 양쪽을 방어하기에는 수적으로 매우 열세였다. 그 결과 메탁사스선은 적절한 병력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독일군은 방어선을 뛰어넘어가 알바니아 지역의 그리스군을 포위해 항복시켰다.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군도 수적 열세를 맞아 철수를 목표로 후퇴해야 했다. 며칠간 연합군은 테르모필레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데 성공하며 그리스 방어부대를 철수할 수 있도록 함선을 준비하는 시간을 벌어주었다.[2] 독일 육군은 4월 27일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입성했으며, 4월 30일에는 그리스 남부 해안까지 진격하여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병력 7천명을 생포하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리스의 완전한 정복은 한달 후인 5월 크레타 전투로 끝났다. 항복 이후 그리스는 독일, 이탈리아, 불가리아의 분할 군정 체제에 들어갔다.[3]

아돌프 히틀러는 나중에 소련 침공 작전의 실패를 베니토 무솔리니의 그리스 침공 실패 탓으로 돌렸다.[4] 독일의 역사학자인 안드레아스 힐그루버는 히틀러가 자국 패배의 책임을 자국이 아닌 동맹국 이탈리아의 책임으로 돌려버렸다고 비판했다.[5] 그럼에도 그리스 공방전의 영향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추축국의 전쟁수행에 큰 영향을 가져왔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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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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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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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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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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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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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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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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