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왕사
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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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왕사(興王寺)는 고려 때 개경 근처에 있던 사찰로서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1] 고려의 대표적 사찰들 중 하나로서 정치적인 집합소로 이용되기도 했다.[1]
개요
편집문종 10년(1056년)에 짓기 시작, 12년 만에 낙성된 대사찰이다.[1] 문종 21년(1067년)에 낙성연등회(落成燃燈會)가 있었으며, 대각국사 의천이 이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속장경》을 간행했다.[1] 의천이 제1대 주지이며, 제2대 주지는 숙종의 넷째 아들로서 승려가 된 징엄(澄嚴)이었다.[1][2]
1363년(공민왕 12년) 음력 3월에 이 절에서 공민왕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홍건적이 대거 침입하자 공민왕은 잠시 복주(福州) 청주(淸州)로 피신했다가 환도하여 잠시 흥왕사에 행궁을 차리고 있었다. 그때 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김용(金鏞)이 역심을 품고 무리들과 함께 이 절에 침범하여 시위를 죽이고 왕까지 시해하려 하였다.[3] 공민왕은 다급히 태후 밀실로 피신하였고,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적도들의 칼을 막아 사직을 보전할 수 있었다.[4] 이때 환관 안도치(安都赤)가 공민왕과 용모가 비슷하였으므로 반도들이 그를 왕으로 오해하여 죽였다고 한다. 반란은 최영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5]
관련 문화재
편집- 흥왕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 - 국보 제214호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다 라 마 한국사 > 중세사회의 발전 > 귀족사회와 무인정권 > 귀족문화 > 흥왕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 인명사전 > 한 국 인 명 > ㅈ > 징엄,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1997년 초판9쇄 p435
- ↑ [네이버 지식백과] 흥왕사 [興王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네이버 지식백과] 최영 [崔瑩]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변(金鏞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 1등이 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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